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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의 번역상의 오류(5)-오리겐의 성경 헥사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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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2년 11월호>

오리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교리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도덕률만을 받아들이는 에비온파였다. 이러한 경향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교회의 보편화된 흐름이 되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 구원론을 믿었다. 누구나 예수 구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던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인데, 오리겐은 자기 의지를 행사하지 않고 교회만 다니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회개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만 다니다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는 또한 유아세례도 믿었으며 성찬식을 통하여 죄가 용서된다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인 것도 믿지 않았으며, 육신적인 부활도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재림도 믿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한갖 피조물에 속한다고 우기면서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부인하였다. 어떤 기록을 살펴 보아도 그는 단 한 명이라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적이 없으며 그 자신의 구원 간증도 찾아 볼 수 없다.
그 다음 인물로 소위 크리스챤 황제인 콘스탄틴을 들 수 있다. 기록상으로는 그가 4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개심했다는 것의 진지성이나 개심의 동기 자체도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성경원문과 그와의 관계만을 다루려고 한다.
그가 성경을 갖고자 하여 최초의 교회사가인 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게 성경 50권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불행하게도 그는 적합치 못한 사람을 선정한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아리안 교도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그 역시 성경을 내용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리겐을 극구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A.D.331년에 그가 50권의 성경을 복사해 냈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 오리겐이 고쳐 놓은 그 성경에 근거를 두어 만든 것이었다. 그 다음 단계로 성경이 손상된 경로는 제롬이 A.D.400년 경에 기록한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로 이어진다. 제롬의 라틴 역본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원천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 유세비우스가 오리겐을 칭송했듯이 제롬은 유세비우스를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제롬은 그가 카이사랴에 있는 유세비우스의 도서실에 갔을 때 오리겐이 만든 필사본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음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오리겐과 제롬의 교리는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오리겐의 성경(핵사플라)에는 7권의 외경이 들어있다. 이것은 그가 전통을 교리보다 더 중히 여겼음을 증명한다. 여하튼 제롬의 성경은 그때부터 림즈 두웨이 성경(Rheims Douay Bible, 1582) 이전까지 1천년 동안 카톨릭 교회의 표준성경이 되었었다.
바티칸 사본(B)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81년이었다. 그것이 발견된 것은 교황청 도서실이었다. 그 사본이 기록된 연대를 A.D.325~350년 경으로 보고 있다. 이 연대는 바로 콘스탄틴 대제가 유세비우스에게 50권의 사본을 만들라고 했던 그 때와 일치하며 이것이 유세비우스가 만든 사본의 하나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념과 별로 차이가 없는 연대이기도 하다. 딘 버간(Dean Burgon)은 이 바티칸 사본이 남아 있던 경위를 이렇게 들고 있다. 이것은 좋은 면으로 생각하여 과장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나쁜 의미로 살아 남은 것이다. 오류가 없는 원문들은 서로 다투어 복사하느라고 일찍 마모되어 없어졌으나 복사할 가치가 없는 것은 선반 위에 얹어져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비평사본인 시내사본(Aleph) 역시 같은 경우이다. 이 사본이 발견된 것은 1855년 시내산에 있는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였다. 독일학자 티센돌프가 얻은 것인데, 마침 땔감으로 쓸려고 쓰레기통에 버려 놓은 것을 가지고 가장 원문에 가까운 사본이라고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이것 역시 기록된 연대를 A.D. 340년경으로 보며 바티칸사본과 동시의 것으로 본다. 만일 그 필사본이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면 왜 땔감으로 쓰려고 쓰레기통에다 내버렸을까 하는 점이다. 그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 가치를 몰랐단 말인가?
이 두 사본을 인용하여 후에 소위 비평사본을 만든 것이 영국학자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였다. 이와 같은 사본을 독일에서는 1895년에 네슬(Nestle)이 만들어 냈으며, 여기에서 다시 영어개역본(RV)과 미국표준역본(ASV) 등이 번역되었고, 또 한국 성경 등으로 그 변개의 맥이 이어진다.
신약성경은 인쇄기가 발명된 1450년 경까지 꾸준히 손으로 복사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필사본은 약 5천 종류에 달한다. 필자가 종류라고 한 이유는 그 규모가 단 두 절이 있는 조그만 부스러기 조각에서 시작해서 신약 전체를 담고 있는 것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기록된 연대도 2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까지이다.<다음호에 계속>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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