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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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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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8월호>

현대 성경 번역본들을 권장하는 글이나 광고를 한번 읽어 보면, 그 번역자들이 얼마나 많은 학위를 땄고 얼마나 거룩하며 경건하고 학자적 자질이 대단한지 설명하는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역본의 서문이나 머리말을 읽어 보라. 그러면 현대의 번역자들은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비평적인 태도를 취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킹제임스성경의 헌사는 최근 인쇄된 몇몇 판본에도 실려 있다. 그 헌사에서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은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더욱더 알리기 위한 부족한 도구들입니다.”
권위있는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몇 개의 작품들이 출간되어 왔었다. 존 헨리 토드의 , 역시 존 헨리 토드의 (1834), 알렉산더 멕클루어의 , 구스타브스 페인의 등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올가 옵펠의 와 애덤 니콜슨의 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주제가 이 시점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대두된 이유는 2004년 7월이 바로 제임스왕이 당시 런던의 감독이었다가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취임하려 했던 리차드 밴크로프트에게 성경 번역과 관련해 보낸 서한을 기록한 지 4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 편지에서 왕은 그가 “일단의 54명의 학자들이 성경을 번역토록 임명되었다.”라고 기록했다. 1604년 7월은 또한 밴크로프트 감독이 캠브리지 대학에 번역자들에 대해서 언급하며 편지를 쓴 달이기도 하다. “이 일을 수행하도록 임명된 이들의 명단은 (캠브리지의 히브리어 교수) 리블리가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며, 그 숫자를 유의해서 보기 바라고, 해외에 있는 이들은 국왕의 이름으로 서한을 보내 (나의 임무가 거기까지 미치므로) 모든 변명을 제쳐 두고, 그들이 속히 캠브리지로 와서 그곳에서 스스로 이 일에 즉시 임하도록 하시오.”
1604년 1월 햄프턴 왕궁 회의에서 권위 있는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안이 개진되었다. 회의 이튿날 청교도인 레이놀즈 박사가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수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후 그는(레이놀즈) 성경을 새로 번역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왕을 감동시켰고, 그 이유는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통치기간에 허락된 것들은 변질된 것이며 원문의 진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왕은 그 안을 기쁘게 여겼고, 감독들이 왕이 “권위를 부여한” 새로운 번역 성경에 대한 위원회를 형성하도록 지시했다. 왕은 이 일이 “감독들이 번역자들을 재고한 후, 두 대학의 가장 학식이 뛰어난 학자들과 교회 내의 주된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회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된 “교회 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일들에 대한 문서”에서 새로운 번역 작업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폐회 후 작성된 고려해야 할 주요한 사안들의 목록에서 네 번째 항목은 “주의를 기울여 한결같은 성경 번역본이 출간되어야 하며, 교회에서 읽혀져야 한다. 또 본문에 어떤 주도 달아서는 안 된다.”라고 기록한다. 동년 3월에 작성된 감독들의 진행 보고서는 번역을 위한 계획들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성경 번역에 관한 네 번째 항목은 아직 착수되지 않았다.”

그러나 6월경에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1604년 6월 30일 번역자들의 잠정적인 명단이 왕에게 제출되었고, 밴크로프트 감독은 이렇게 기록했다. “폐하께서 성경 번역에 종사해야 할 모든 사람들의 선정을 잘 알고 계시고, 리블리가 그대에게 이를 잘 주지시켜 줄 것이며, 폐하께서 위의 선정을 매우 흔쾌히 승낙하셨다. 폐하께서는 선정된 번역자들이 매우 경건하기에 어떤 일도 더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크게 바라시므로, 그대에게 폐하의 이름으로 최대한 속히 여러분들이 대학에서 함께 모여 번역일을 시작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전하라 지시하셨습니다.”
그후 1604년 7월 22일 제임스왕은 밴크로프트 감독에게 이렇게 서한을 보냈다. “또한 짐이 그대에게 명하노니, 모든 감독들로 하여금 그들의 교구 내에 속해 있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특별히 능통한 모든 학자들로서 히브리어 및 헬라어에 있는 모호한 부분들뿐만 아니라 어떤 난제들이라도 해결하고 또한 이전 영어 번역본에 있는 오류들을 해결하고자 개인적으로 성경 연구에 수고해 오고 있는 사람들을 파악토록 하라. 비록 짐이 철저히 검토하고 수정하라고 그들에게 명한 바는 없으나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 일에 있어 짐의 기쁨을 알리고 진지하게 그들에게 맡겨서, 그러한 그들의 연구결과를 캠브리지의 히브리어 교수 리블리나 옥스포드의 히브리어 교수 하딩 박사나 웨스트민스터의 학장 앤드류스 박사에게 보내도록 하고, 또 각각의 그룹들의 나머지 위원들에게 전달케 하여 우리가 의도한 성경 번역이 우리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주요한 학자들의 도움과 협력을 받도록 하라.”

권위있는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의 명단과 직위와 실력에 대해서 지금까지 충분한 논의가 있어 왔기 때문에 이 글에서 다시 이를 조명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번역자들의 수와 그들에 대한 자세한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자주 지나치는 경향이 있어 여기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번역자들의 수에 관한 것이다. 제임스왕이 보낸 7월 22일 서한에는 성경을 번역토록 54명의 사람들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단들은 47명만을 제시할 뿐이다. 이 부분은 번역자들에게 주어진 번역 원칙 제15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항목은 다른 저서에서 자주 생략되는 부분이다.) “앞에 언급한(제13조에서) 책임자들 외에도 대학교의 진지한 원로 목사 서너 명을 임명하여, 직접 번역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부총장에게 지시로 나머지 책임자들과 함께 회의를 열어 히브리어와 헬라어뿐만 아니라 번역본들의 감독자들이 되어 위에 명시된 제4조를 더 잘 준수하도록 한다.” 54명과 47명 간의 7명의 차이는 제15조에 따라 한 대학에서 4명을, 다른 대학에서 3명의 감독자들을 선정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게다가, 번역자들에게 주어진 제11조, 제12조와 제임스왕이 보낸 서한 또한 다른 학자들에게도 자문을 구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둘째로, 번역자들의 명확한 신원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6개의 그룹으로 나눠졌음을 안다. 두 그룹이 옥스포드에서, 다른 두 그룹이 캠브리지에서, 마지막 두 그룹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모였다. 웨스트민스터에서 모인 그룹들은 창세기에서 열왕기하까지 그리고 로마서에서 요한계시록까지를 번역했고, 이들의 명단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또한 캠브리지에서 모인 무리들은 역대기상에서 전도서와 외경을 번역했고, 이에 대해서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옥스퍼드에 모여서 작업했던 번역자들의 명단, 특히 복음서와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을 번역한 두 번째 그룹에 대해서는 계속되는 불일치가 있고, 확연하게 이 부분이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 명단에는 첫 번째 옥스포드 그룹이 나열되어 있고, 이 그룹은 이사야에서 말라키까지 번역했으며, 존 하딩, 존 레이놀즈, 토마스 홀랜드, 리차드 킬비, 마일즈 스미스, 리차드 브랫, 리차드 페어클로크의 7명이다. 때때로 이름의 철자상 변이가 있으나 이것이 그 명단이다. 그러나 열네 명이 서명한 청원서에서, 그 중 두 명은 우리가 번역자인 것을 알고 있고, 잘 알려진 히브리어 학자이자 흠정(欽定) 강좌 담당교수인 윌리암 손에 대한 것이다. 손 “역시 그 대학에 주어진 구약성경의 그 부분을 번역하는 데 종사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번역자들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옥스포드의 두 번째 그룹에서 번역했던 이들의 명단은 그 처음부터 논쟁이 되었다. 이 그룹의 8명 중 2명이 논쟁이 된다. 이 부분이 복잡하게 된 것은 원 명단에서 그 중 네 명을 그들의 성명이 아닌 직위로 열거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네 명은 크라이스트처치, 윈체스터, 월체스터, 윈저의 학장들이었다. 햄프턴 왕궁 회의가 열렸을 당시 웰체스터의 학장은 리차드 에데스이다. 그는 1604년 11월에 죽었고 두 번째 옥스포드 그룹에서 존 애글리온비로 대체되었다. 이것이 바로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의 몇 개의 명단에 에데스의 자리에 애글리온비의 이름을 쓴 이유이다. 제임스 몽테그라는 이름은 때때로 에데스 대신에(혹은 그의 이름에 이어) 나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가 에데스의 학장 직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그가 번역자의 임무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의문시되는 이름은 랄프 레이븐즈이다. 어떤 명단은 레오날드 휴튼을 레이븐즈의 자리에 넣거나 그에 더하여 넣기도 한다. 그러나 레이븐즈는 1616년까지 죽지 않았고, 왜 그가 휴튼에 의해서 대체되었는가 하는 것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토마스 풀러(1608-1661)는 그의 저서 에서 에데스와 레이븐즈를 원 번역자들로 열거한다. 버넷 주교(1643-1715)는 그의 저서 에서 “월체스터의 학장”과 “레이븐즈 박사”를 함께 언급한다. 버넷은 그의 명단을 원 번역자들 중 하나인 레이비스 감독의 문서로부터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풀러와 버넷과는 달리, 존 루이스는 1731년에 처음 출간된 그의 저서 에서 “월체스터의 학장”을 언급하지만 그를 몽태그와 동일인으로 취급하고 다시 “레이븐즈 박사”를 언급한다.
번역자들의 명단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650년 이전에 쓰인 것이 확실한 한 편지에서인데, 그것은 번역자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문서의 저자는 월체스터의 학장이 “나의 사본에는 전혀 없다.”라고 주장했고 계속해서 에데스 박사를 헨리 패리 박사가 계승했고, 헨리 패리는 몽태그 박사가, 몽태그는 앤쏘니 레이크(혹은 레이크스) 박사가 계승했다고 한다. 반면 그가 누군가에게 쓴 서신에 있는 명단에는 월체스터의 학장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당신의 것에는 그것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써 있다.) 편지의 저자는 에데스가 아니라 패리가 의문시되는 학장이라고 단정한다. 즉 그가 쓴 편지에서는 레이크 박사가 월체스터의 학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번역자들이 선정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크 박사에 대해서 1605년 5월의 공식 문서는 그가 “런던에서 신약성경의 번역에 관여했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조지 리브스의 경우이다. 빌슨 감독이 1605년에 쓴 편지에서 리브스 박사는 “헬라어에서 번역이 진행 중인 신약의 감독자들 중 하나”라고 언급된다. 그러므로 손과 레이크와 리브스의 이름이 왜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의 어떤 명단에도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이유는 그들 모두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번역본들의 감독자들”로 임명된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에데스를 제외한 다른 번역자들은 성경이 1611년에 출간되기 전에 죽지 않았다. (에드워드 리블리는 1605년에 사망했고, 랄프 헛친슨과 윌리암 다킨스는 1606년에, 존 레이놀즈는 1607년에, 토마스 레이비스와 존 애글리온비는 1609년에 각각 사망했다.) 그러나 일단 번역 작업이 시작되어 진행 중일 때는 번역자들이 죽더라도 대체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번역자들에 대해서 또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 중 일부가 1604년에 열린 햄프턴 왕궁 회의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윌리암 발로우(1613년 사망), 란셀럿 앤드류스(1555-1626), 존 오버롤(1560-1619), 조지 애봇(1562-1633), 토마스 레이비스(1560-1609), 리차드 에데스(1555-1604), 가일즈 톰슨(1553-1612), 그리고 제임스 몽태그(1568-1618)이다.
권위있는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로 섬겼던 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이와 같은 면밀한 역사적 고찰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지금 영어 성경의 역사에 있어서 이들 “학식있는 사람들”의 역할은 일반 성도와 학자 모두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권위있는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선사한 결과물인 이 성경이 더 소중함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겠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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