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최종권위 분류

최초의 원본과 같은 권위를 지닌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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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6월호>

그리스도인은 최초의 원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최초의 원본에 얼만큼의 가치를 두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최초의 원본에 대해 기록한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최초의 원본을 다루시는 대로 가치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최초의 원본에 대해 논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불가능합니다. 이는 최초의 원본이 사라진지 너무나 오래 되었으므로 그것을 지금 증거자료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초의 원본에 대해 성경에서 제시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다루신 만큼의 가치를 두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최초의 원본에 대한 해답을 예레미야 36장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곳에는 예레미야가 기록했던 두루마리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36:21에 보면, 그 두루마리가 여호야킴왕 앞으로 옮겨졌고 예후디가 왕 앞에서 그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왕이 예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자, 에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왕과 왕 옆에 서 있는 모든 고관들의 귀에 그것을 읽었더라』(렘36:21). 그런데 36:23에 따르면, 예후디가 서너장을 읽고나서 그것을 손칼로 잘라서 화덕에 던져 두루마리는 불타고 말았습니다 : 『예후디가 서너 장을 읽고는 그것을 손칼로 잘라서 화덕에 있는 불에 던졌으니 온 두루마리가 화덕에 있는 불에 다 탔더라』(렘36:23). 따라서 예레미야가 기록한 최초의 원본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처음에 두루마리에 있었던 이전의 모든 말들을 다른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하셨으며, 그렇게 해서 두번째의 원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렘36:32).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번째로 기록하게 하신 예레미야서의 원본에는 처음의 기록 이외에 다른 말씀들을 더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 『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기록한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을 불사른 후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 왕 여호야킴이 불사른 처음 두루마리에 있었던 이전의 모든 말씀들을 거기에 기록하고(36:27-28) ... 그러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하여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니, 그가 유다의 여호야킴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씀들을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많은 비슷한 말씀들을 거기에 더하였더라(36:32).』 따라서 원본이 두번째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불타 없어진 예레미야 45장부터 51장의 본문이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다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번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예레미야 51:59-64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그가 바빌론에 가게 되면 그 두루마리를 읽고서 그것을 돌에 묶어 유프라테스 강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 『유다 왕 시드키야 치리 제 사년에 마세야의 손자요, 네리야의 아들인 스라야가 왕과 함께 바빌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명한 말이라. 이 스라야는 숙소 책임자였더라. 예레미야가 바빌론에 임할 모든 재앙, 즉 바빌론에 대하여 기록된 이 모든 말씀들을 한 책에 그같이 기록하였더라.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바빌론에 이르거든 보고 이 모든 말씀들을 읽을지니라. 그때 너는 말할지니 ‘오 주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곳을 차단하여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무도 그곳에 거하지 못하게 하고 영원히 황폐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네가 이 책을 읽기를 마치면 책에다 돌을 매어 유프라테스 가운데다 던지고 너는 말하기를 ‘바빌론이 이같이 가라앉아 내가 그녀에게 내릴 재앙으로부터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지치게 되리라.’ 하라.” 하더라. 예레미야의 말들이 여기까지라.』 결국 이렇게 해서 두번째 원본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예레미야 45장부터 51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출처가 어디겠습니까? 바로 두번째 원본의 필사본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세번째 원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초의 원본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물론 모든 성경에 예레미야 45-51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번째 원본이나 세번째 원본의 필사본으로부터 번역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최초의 원본 그 자체를 보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원본은 필사되었고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원본에 대해 가치를 두신 것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두어야겠습니까? 그러한 강조는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최초의 원본이 지금 있다 해도 그것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올바로 보존된 성경들에서 원본의 본문을 그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이슬러(N. Geisler)의 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원본만이 영감받은 것이고 사본이나 번역본은 영감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만일 원본만이 오류없이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것이고 번역자들의 오류는 불가피한 것이라면 성경본문 말씀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직접 영감받은 것은 원본이지만 훌륭한 사본도 실질적으로는 영감받은 것이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원본이나 원본이 오류가 있다는 두 가지 극단은 피하면서, 훌륭한 사본이나 번역본도 실질적인 모든 면에서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직접적인 영감은 원본에 주어진 것이지만 번역본도 실질적인 영감을 가지고 있다... 직접 영감받은 것은 원본이지만 정확한 사본이나 번역들도 원문을 올바르게 재생하는 한 실질적으로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영감의 정도에 차이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모든 성경은 동일하게 영감받았고, 따라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진리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원본은 영감받았고(inspired), 올바른 필사본과 번역본은 보존되었다(preserved)는 것이 성경의 영감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영감은 하나님께서 백지상태의 종이를 취하셔서 사람들을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신 것이며, 보존은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하신 성경을 취하셔서 사람들을 사용하심으로 현재까지 지키신 것입니다. 이 두 과정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수행하시며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감받은 성경과 보존된 성경은 똑같이 모든 판단에 있어서 절대권위와 최종권위를 지니는 것입니다.

번역이 영감받을 수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몇 차례에 결쳐 번역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째, 창세기 42-45장에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만났을 때 히브리어가 아닌 이집트어를 사용했습니다. 창세기 42:23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그들은 요셉이 그 말들을 이해하는 줄 알지 못하였더라. 이는 그가 그들에게 통역을 통해 말하였기 때문이라.』 그런데 만약 어떤 번역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온전히 옮겨질 수 없다면, 요셉의 이집트어 표현이 히브리어로 번역되어 기록될 때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히 기록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창세기 42-45장을 영감으로 기록하셨는데, 어떻게 영감으로 기록될 수 있었습니까?
일반적인 학자들의 기준에 따르면, 누구에게 영감을 주셨는가를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집어로 말한 요셉의 말입니까? 아니면 이집트어를 히브리어로 통역한 요셉의 통역관에게 주신 것입니까? 또는 히브리어로 구약을 기록한 모세에게 영감을 주셨겠습니까?
그러나 창세기 42-45장에서 이집트어와 히브리어가 사용된 대화를 두고 영감을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영감은 “기록된 말씀”, 즉 최종 결과물인 성경의 “기록”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통역관 사이에 사용된 이집트어를 모세는 창세기 42-45장에서 분명히 히브리어로 기록했습니다. 만일 번역에 영감이 없다면 어떻게 모세의 기록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출애굽기 4-14장에는 모세와 파라오의 대화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도 창세기 42-45장에 나타난 것과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어로 파라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음에도 그 말들은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성령님의 충만하신 인도하심으로 말했지만 그들의 말에 영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성경 “기록”에 영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집트어에서 히브리어로 영감받은 번역이 출애굽기 4-14장의 많은 말씀들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말씀입니다.
셋째, 사도행전 22장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을 향해 ‘설교’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히브리어로 ‘설교’했던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그가 허락한지라. 바울이 계단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니 아주 조용해진지라. 그가 히브리어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러분 부형들이여, 이제 내가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나의 해명을 들으라.”고 하니 (그들이 그가 히브리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더욱 조용해지더라. 바울이 말하기를)...』(행21:40-22:2). 이렇게 히브리어로 말한 사도행전 22장의 바울의 설교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고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의 설교입니까? 아니면 누가의 기록입니까? 이제 감동을 받아서 말한 것과 영감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말씀이 누가가 처음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즉 최초의 원본이 기록될 때 사도행전 22장에 영감받은 번역이 기록된 것입니다.
이제 번역은 영감받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주장을 수용하겠습니까? 아니면 성경말씀을 수용하겠습니까? 성경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필사본과 번역본의 권위

그러나 이것이 곧 성경을 한 나라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나, 번역본이 영감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서 영감을 주셨고 성경의 기록은 이미 오래 전에 완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감받은 것은 기록된 성경임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영감받은 그 성경을 일점일획의 삭제나 첨가 없이 그대로 보존하십니다(시12:6-7, 마5:18, 막13:31, 계22:18-19).
그러므로 영감받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에게, 또는 번역하는 사람에게 영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사자들과 번역자들을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인도하셔서 진리로 이끄실 때(요14:26), 처음에 영감받은 그 성경 말씀을 그대로 필사하거나 번역했으면 그 필사본과 번역본은 영감받은 말씀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필사본과 번역본 역시 영감받은 처음의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필사본과 번역본은 영감받은 말씀을 가감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필사본과 번역본은 영감받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필사본과 번역본이 변개되지 않은 것이라면,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되었다면, 처음에 영감받은 말씀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면, 그 필사본과 번역본은 디모데후서 3:16에서 말씀하는 “모든 성경”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현재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성경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번역본이든, 필사본이든, 편집된 히브리어나 헬라어 원문이든 간에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성경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나 학자들이 그 최종권위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최초의 원본과 같은 권위를 지닌 성경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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